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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명한 하늘 아래, 녹녹한 기운이 완연한 봄바람이 돌고 돌아 이곳 ‘향월정(香月亭)’에 내려앉았다. 동궁전의 뒷마당으로 내어진 문턱을 넘으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는데, 이를 본 선왕이 후(后)의 금원(禁苑)에 가려진 기려하고 함함한 지상낙원이라 칭하였다. 황송한 천포(天褒)에 제 주인보다 기뻐하던 동궁전 사람들은 궁 전체를 날래게 다니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풍문을 빌리자면, 백화난만한 꽃길의 향연에 눈이 멀고 가장자리에 심어진 커다란 복사나무의 꽃내음에 취해 걸음을 뗄 수 없어 한참이나 넋을 놓게 된다고 한다. 한편, 소문의 금원을 품은 향월정의 주인 장조는 진분홍 빛깔의 해당화 잎을 띄운 술잔을 기울이며 평화로운 정취를 맛보고 있었다. 흑룡포 소맷자락 사이로 곧게 뻗은 탄탄한 팔목과 부채꼴을 닮은 둥근 이마가 붓을 놀린 듯 유려한 곡선을 이뤘고, 밤하늘에 깔아둔 주단과 같은 검푸른 색의 머리카락은 금을 입힌 상투관에 단단히 묶여 옥안(玉顔)을 더욱 환하게 비추었다. 과연 극락의 주인다운 자태였다.

 

 “전하, 홍촌의 차남 억태 들었사옵니다.”

 “들라하라.”

 

 상선의 말에 청금석을 박아놓은 듯한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홍촌의 차남 억태는 그의 유일한 배동이었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장조의 성정을 염려한 선왕의 배려였다. 우애 좋은 형제처럼 자란 두 사람은 장조가 가례를 준비하는 과년에 접어들면서 걸음을 멀리 하였는데, 이를 눈치 챈 장조가 깨달음이 부족하여 왕이 되기 이전에 지아비로서도 자격이 없다는 핑계를 덧붙이며 중언부언 늘어놓았다. 한 마디로 혼례에 일절 관심 없으니 지금처럼 계속 놀겠다는 심보였다. 하나뿐인 세자의 청이니 그 고집을 누가 꺾으리오. 하여 이름만 배동일 뿐인 그가 지금까지도 입궐할 수 있었다.

 

 “전하, 홍촌의 차남….”

 “인사는 됐으니 어서 앉거라.”

 “…송구하오나 이는 예가 아닌 줄로 사료되옵니다.”

 “되었다 하지 않았느냐. 내 말이 우스운 게야?”

 “당치도 않습니다!”

 “그렇지? 억태 너는 내 말만 들으면 된다. 게 상선 있느냐?”

 “네, 전하.”

 “가서 맛난 것 좀 내어오너라. 알아서, 잘.”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혹여나 억태의 입에 맞지 않는 걸 내오면 네놈의 쓸모없는 멱을 쥐어뜯겠단 의미였다. 억태가 잠시 눈을 돌린 사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장조의 날 선 눈빛에 상선은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옮겨야 했다. 금원을 벗어나자마자 수라간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수라상궁을 붙잡으며 두서없는 하소연을 내뱉었다. 어쩜 저리도 영악하신지. 여우 새끼도 이만큼은 아닐 거라며 답답한 속을 벅벅 긁었다. 이러다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못 살아!

 

 일각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개의 상이 올라왔다. 귀한 얼음 대접과 함께 술에 곁들이기 좋은 묵과 간장에 절인 산적이 차려진 연엽반은 장조의 앞으로, 갖가지 주전부리가 차려진 정사각형의 소반은 억태의 앞으로 놓여졌다. 소반의 차림새를 보아하니 장조의 입김이 단단히 들어가 있음을 짐작게 했다. 오색의 맛깔스러운 다식과 찹쌀과 태말을 버무린 고소한 인절미, 먹기 좋게 잘라놓은 호두강정에 끝 맛이 말끔하여 입가심에 좋은 석류차까지. 색이면 색, 향이면 향 무엇 하나 빠짐없는 풍성함이었다. 장조도 만족스러운지 제법 개운한 얼굴을 하고는 친히 억태의 바지 위로 휘건(揮巾)을 덮어주었다. 달큼하게 미소 짓는 장조와 눈이 마주친 억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토록 곱고 존귀한 손으로 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저를 챙겨주는 다정함에 가슴께로부터 차오르는 뭉근한 열기를 느꼈다,

 

 “자, 억태야. 맛 좀 보거라.”

 “저, 전하. 매번 이리도 귀한 것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괜찮대도─ 사양 말고 편히 들거라.”

 “…그럼.”

 

 장조가 잔을 들자 억태 역시 조심스럽게 저(箸)를 들어 인절미를 집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쫀득한 식감에 놀라 접시를 한 번,장조를 한 번 번갈아 쳐다봤다. 유모가 해주던 절편도 맛있었지만, 궁에서 먹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일품이었다. 맑은 홍색을 띠는 석류차 또한 신맛이 거의 나지 않아 가볍게 목을 축였다.

 

 “어떠냐, 맛이 좋으냐?”

 “네! 아주 으뜸으로 맛납니다.”

 “참으로?”

 “참으로요!”

 

 아차, 아무리 맛이 좋아도 그렇지! 예법도 잊고 신나게 고개를 주억인 자신을 돌아보던 억태의 두 볼 위로 복사꽃이 발그스름하게 피어났다. 상선이 눈치껏 아랫것들과 자리를 비켜선 지 오래라 눈치 볼 이 하나 없거늘, 입술을 달싹거리며 앓는 듯한 모습이 퍽 어여뻤는지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장조가 제 귓불이 달아오르는 것도 모르고 억태를 곁으로 바짝 당겼다.

 

 “억태야.”

 “네, 전하.”

 “약조 하나 해주련?”

 “무엇을 말이십니까?”

 “나와 있을 땐 편히 하거라. 말도, 행동도 눈치 볼 필요 없느니라.”

 “하오나 전하….”

 “우리가 어디 남이냐? 군신이기 이전에 벗이자 친동기와 진배없는 사이 아니더냐. 네가 그러면 나 또한 편치 않으니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거라. 응?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네, 전하. 약조하겠나이다.”

 

 결과가 빤히 보이는 우문(愚問)이었지만, 성실하게 답한 억태를 가볍게 끌어안은 장조는 방싯방싯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 * *

 

 

 

 집안 어르신들이 붙잡는 통에 느지막이 신시(申時)에 입궐한 억태는 동궁전을 향해 걸음을 바삐 했다. 상선을 따라 내당(內堂)으로 들어서자 장조가 읽고 있던 서책을 덮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간의 못다한 정을 쌓을 듯이 시립 해있던 상선을 물리고 억태를 가까이 앉혔다.

 

 “억태야, 오랜만이다.”

 “네, 전하. 강녕하셨는지요?”

 “그새 약조를 잊은 게야? 편하게 하래도.”

 “아… 응.”

 

 응? 장조는 싸하게 밀려드는 요상한 기분에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닷새 전과 달리 억태의 그늘진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여 무슨 일이냐 물어도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말을 아꼈고, 평소라면 잘도 집어먹었을 인절미와 유과엔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당장에라도 작달비가 쏟아져 내릴 듯 침통한 얼굴을 하고도 애써 말간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아, 탄식이 절로 나올 지경이로다. 장조는 매우(梅雨)를 핑계로 내당을 빠져나오자마자 상선부터 찾았다. 네놈은 뭔가 알겠지.

 

 “이봐, 상선!”

 “네, 네! 전하, 찾으셨사옵니까.”

 “억태 왜 저래? 아는 대로 불어.”

 “전하…. 말씀을 가려주시옵소서. 민촌의 시정잡배도 아니고….”

 “뭐?! 이게 진짜.”

 

 주먹을 높이 들어 내려칠듯한 기세로 다가오자 상선이 바닥에 냅다 머리를 처박았다. 전하, 제발 말로 합시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상선은 굽은 등을 파르르 떨면서도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가문 내에서도 은밀히 오가는 말인지라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해도 근래 홍촌의 당주와 자주 접촉하는 이들이 모두 혼례를 치르지 않은 어린 여식을 두고 있다는 점을 미뤄보았을 때, 그가 유추해낼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상선은 말끝을 흐리며 답하기를 꺼렸지만, 눈치 빠른 장조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왕세자의 말은 어명 다음으로 불복할 수 없는 것. 한 나라의 유일한 세자라는 이가 사대부가의 차남을 불러다 약관이 다되도록 소꿉놀이나 하는 걸로도 모자라 빈은커녕 마음에 둔 여인조차 없다 하니 날이 갈수록 조급한 마음이 들었을 터, 따라서 가장 구슬리기 쉬운 억태를 이용할 셈인 게지. 쯧─ 고얀 것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전하.”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들 입단속 잘해. 어? 눈치 주거나 주눅 들게 하기만 해봐.”

 “하오나….”

 “왜, 또 뭐! 또 한바탕 뒤집어 주랴?”

 “저, 전하! 그것만은…!”

 

 장조는 애절하게 늘어지는 상선의 말을 매몰차게 짓밟으며 사라졌다. 궁에서야 이토록 패악을 부리는 장조가 있으니 눈치 주는 이도 없겠지만, 사가(私家)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저를 위해주는 이 하나 없는 그곳에서 얼마나 외롭고 고단했을꼬. 생각만으로도 안타까움이 뚝뚝 흘러넘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장조는 저도 모르게 어디선가 억태의 작은 흉이라도 들리면 횡포 아닌 횡포를 보이며 나쁜 소문으로부터 그를 지켜주곤 했다. 물론 어리석은 억태만은 끝까지 모를 일이었다.

 

 협박으로 이루어진 상선과의 대화가 길어진 탓에 시간은 어느덧 유시(酉時)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는 곧 억태의 퇴궐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기에 장조의 낯빛은 어두워져 갔다. 어째 이대로 보내기엔 다 풀지 못한 미련이 남아 억태에게 석반을 함께 할 것을 청했고, 상선이 잽싸게 끼어들어 당주께는 늦을 거란 서신을 넣은 참이라 했다. 정확히는 곧 서신을 ‘쓸’ 참이지만, 장조와 상선은 이미 서로의 생각을 눈빛으로 읽어낸 후라 거칠 것이 없었다. 내가 하면 사탕발림, 남이 하면 기만행위. 딱 그 짝이로다. 억태는 상선의 말을 찰떡같이 믿고 옳다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눈치 없는 저라도 집안 분위기가 달갑지는 않으니 귀가가 늦어지는 편이 좋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평소완 달리 유난을 떠는 장조가 싫지 않아 기꺼워하며 서툰 어리광을 받아줬다. 이리도 좋아하시니 역시 퇴궐을 미루길 잘한 성싶었다. 서로 무릎이 부딪힐 정도로 붙어있기를 한 식경, 억태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으로 푸짐하게 차려진 석반상을 깨끗이 비우자 여과 없이 주안상이 들어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주눅 든 억태도 달랠 겸 올라온 맛 난 주전부리도 한 움큼이다. 자, 비단에 버금가는 멍석도 깔렸으니 원 없이 뒹굴며 놀자꾸나.

 

 “아차, 요즘 홍촌가(家)가 바쁘다던데.”

 “드, 들었어?”

 “모를 것도 없지. 혼례라도 치루라든?”

 “…그게…….”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억태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렸다. 어이쿠! 적잖이 술이 기울었을 때를 틈타 야들야들하게 구슬린다는 것이 그만, 대차게 울리고 말았다. 보는 이의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숨죽여 우는 억태를 제 무릎에 앉힌 장조가 어린아이를 어르듯이 ‘옳지, 옳지.’ 하며 등을 토닥였다. 때아닌 눈물 소동에 태연한 건 장조뿐인 듯했다. 생전 해보지 않았을 일임에도 자연스레 억태를 달래곤 서과(西瓜)를 담근 달짝지근한 술을 건넸다. 한바탕 눈물을 쏟은 탓에 기력이 다했는지 갈증을 채워가는 목 넘김도 영 시원찮다. 이래서야 원─ 장조는 낮게 혀를 차며 억태의 입가에 흐른 술을 소맷부리로 가볍게 닦아내었다.

 

 “분명 혼인은 좋은 것이라 했는데…. 나는… 왜 이리 속이 상하는지 모르겠어……….”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천하의 장조도 억태의 혼담 사정에 속을 끓였는데 저는 오죽할꼬. 한껏 풀죽은 채로 장조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억태에게서 더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억태는 서서히 감겨오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길 반복했다. 점차 술기운이 도는 모양이다. 짙은 숨을 내쉬는 오동통한 뺨이 잘 익은 과실마냥 한 입 베어 물면 과즙이 흐를 것 같았다. 장조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억태야.”

 “…응.”

 “왜 말을 하다 말아. 졸린 것이냐?”

 “응. 나 베게….”

 “……이왕이면 원앙금침 깔아줄까? 꽃잠─ 아, 아무튼 나랑 같이 잘래?”

 “어어…. 자자.”

 “참이지? 무르기 없기다!”

 “…응. 졸려…….”

 

 그래, 그래. 장조는 자신이 가매(假寐)에 들 때 쓰던 요를 꺼내와 덮어주고는 침소의대로 갈아입지 아니하고 억태의 옆에 가로누워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 어리숙한 사내는 제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기나 할까? 하긴, 몰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잘못됐다고 느낄 새도 없이 준비할 테니까. 누가 내 말에 토를 달겠어? 뭐든 왕 마음이지.

 

 “그러니 너는 몸만 오렴. 준비는 내가 다 알아서 하마.”

 

 동짓달 초하루가 지나면 왕위에 오를 테니 때가 되면 혼인하자꾸나. 아, 그전에 홍촌의 당주와 만났다는 놈들부터 처리해야겠지.지들 주제에 누굴 넘봐? 화중왕(花中王)이라 불리는 모란보다 화려하고 고운 얼굴로 음습한 속내를 곱씹는 것이 조금은 비열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억태를 감싸 안은 장조의 품은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온기를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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